죽음이란 무엇인가

김겨울님이 이동진평론가의 파이아키아라는 작업실을 방문한 유튜브를 봤는데 그 영상에서 이동진평론가가 여러 책을 추천했다. 나는 거기서 몇가지 읽어보고 싶은 책을 메모했고 (블로그에다 메모함. 좌표는 여기 https://mwah.tistory.com/18?category=948647) 그 중 가장 먼저 읽은 책이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라서 상태가 그닥 좋지 않았지만, 읽을 땐 별 문제 없었음.

 

저자 셸리 케이건은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인물로 이 책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책이라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크 샌델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중 한 명이라고 함. 표지에서 느껴지듯이 사람이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입담이 좋으며 강의할 때 저렇게 항상 책상에 앉는다고 하여 '책상 교수님'이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근데 지금 보니 신기하다. 서양 남자들 중 저렇게 양반 다리 되는 사람 흔치 않은데 허허.

 

입담이 좋아서일까. 심오한 제목과 다르게 책이 그렇게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거의 쓰지 않고 있고, 쓴다고 해도 아주 잘 풀어서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이정도면 중학생도 볼 수 있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건... 그런 뜻이니까.

 

난 철학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 메모를 하면서 읽는데 이것도 양이 꽤 나왔다. 근데 어려운 내용은 결코 아님. 단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일 뿐이지... 아무래도 교양철학이다 보니까 깊이 들어간 것 같진 않다. 책 중간중간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 이런 말 엄청 많으니까요.

 

그냥 대략적으로 죽음 또는 존재에 대해 이러이러한 논쟁이 있고 이렇게저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함.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전반적인 상황 파악을 도와주고 한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물론 저자는 물리주의자인 자신의 입장을 숨기지 않고 그 편에서 서서 설명하기 때문에 (서문에서도 이렇게 할 거라고 공표하고 시작함) 상당히 그 주장에 힘이 실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놀라웠던 부분은... '영혼이 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던 내 자신을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자각했다는 점이다. 책을 읽기 전까진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내가 저런 걸 믿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음. 이 책을 읽고서야 '그러게. 나는 왜 당연히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지?' 생각한 것이다. 억울함에 구천을 떠도는 귀신, 장르소설에 심심찮게 나오는 빙의, 환생을 믿지 않더라도 나는 일상적으로 그런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소비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은 제사라는 문화도 있고 말이지... 종교가 아니라도 일상에서 이런 영혼관점이 숨쉬고 있다. 때문에 인간을 특별한 기계로 보는 이 물리주의적 관점인 이 책은 동양에서는 꽤 신선한 시각 같다. 

 

죽을 운명에 직면할 때, 그래서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비로소 생존경쟁의 쳇바퀴 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신에게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 경쟁에서 이기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는 일에는 별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거라고 스쳐지나가듯 말하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믿음은 절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일관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 쥐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쾌락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은 그 쾌락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언젠가는 다른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어떤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한발 물러서서 그 경험을 평가하는 능력이 있다. (중략) 즉, 인간은 어떤 경험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 경험에 대해 끊임없이 반추한다.

 

첫 번째 전략의 문제점은 쉽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목표들만 추구하다 보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의 인생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로만 가득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 두 번째 전략은 인생에서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은 실패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 소설을 쓰고, 교향곡을 작곡하고,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이런 목표들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이뤄낼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다. 성공 가능성은 낮지만 그 가치는 높은 성취들로 채워진 인생은, 성공 가능성은 높지만 그만큼 의미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리가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을 운명이기 때문은 아니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에 비해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전해야 할 목표가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이루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는 식으로 인생을 허비할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자살의 '합리성'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을 정당화할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개인의 이익이라고 하는 합리적 관점에서 판단한다면,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세상에는 비존재보다 더 나쁜 삶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상황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로 판단이 흐려지고 불안감이 높아지며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자살을 통한 이득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자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말해 자살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보고 단순히 즐겁게 사면서 그 쾌락으로 삶을 채워넣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어떤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한발 물러서서 그 경험을 평가하는 능력이 있다는 구절이 가장 인상 깊었다. 때문에 좀 더 큰 가치를 추구하고 서둘러라.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결론이 지금 내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고갤 끄덕였다. 500페이지가 넘는 양이었지만 사실상 내용이 그렇게 많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철학적인 용어 몇 가지와 그걸 이해시키기 위한 예시, 충분한 설명들 때문에 두꺼워진 것뿐.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중간에 내가 느낀 점을 메모한 글이다. 

 

-솔직히 읽으면서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가정을 하는 거야? 하고 매우 불평했지만, 사유라는 것이 이런 것이겠거니, 논증이라는 것이 어떤 말싸움에서도 이겨야 하기 때문에 이런 가정까지 해서 자신이 맞다는ㅋㅋ 걸 증명하려는 거 아닌가 싶었고, 책 서문에서 이미 작가가 '나는 물리주의임, 이 책은 그게 맞다는 책이 될 거임.'이라고 밝혀서 그런지 답은 정해져 있고 넌 그냥 읽기만 하면 돼 같은 답정너 느낌이 있다. 그치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이 많은 활자를 들여서 이게 맞다고 주장하니 그게 맞는가보다 하고 본다. 

 

(살아있다는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가치적 그릇이론과 삶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중립적 그릇이론을 읽고) - 글쎄. 나도 간지나게 중립적 그릇이론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여성인권이 낮은 나라에 여성으로 태어나버리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 난민이 되어버린 사람의 입장이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생이 까딱 잘못하면 -가 되기 십상이라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든 정신 붙들고 삶을 유지하려면 온건한 가치적 그릇이론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이 이론은 생존수단이 될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