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도우

거의 모든 마블 영화 시리즈를 보긴 했지만 새 영화가 나왔다고 하여 챙겨보진 않는다. 블랙위도우도 사실 별 생각 없었음. 그냥 마침 주말이었고, 동생과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모처럼 영화나 볼까 이야기가 나왔고, 불현듯 얼마전 sns에서 보았던 블랙 위도우 포스터가 떠올랐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접었다 펴서 영화관에 걸어놨던 그 포스터가.

여성의 소비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 질 때도 있다.

 

<블랙 위도우>는 기존 마블 영화보다 어쩐지 액션씬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맞으면 내가 다 아픈 것 같은 리얼한 액션씬이. 기본 설정 자체가 육탄전에 강한 캐릭터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았고 여성이 주연이니 액션이 다소 약하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기 위해 오히려 신경을 많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궁예까지 가능했다.

 

특히 007 대사를 외우던 나타샤가 외국 시내에서 오토바이 체이싱을 하는 장면을 보고 이거 007오마주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오마주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은 히어로 이전에 첩보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타샤와 옐레나가 다시 재회하는 씬도 약간 본시리즈의 한 장면 같았구? 초반에 지붕 위에서 사람 조준하는 장면들도 히어로물보단 첩보영화 아닌가. 허허

 

영화를 보기 전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나타샤의 과거를 정말 잔혹하고 끔찍하게 그려냈을까봐 그게 무서웠다. 언젠가 여학생들을 암살자로 키우는 어두운 기숙학교? 같은 나타샤의 회상씬 같은 게 한 번 나온 적이 있었는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너무나 끔찍하여 당시에도 보기 괴로웠다. 심지어 난 블랙 위도우가 인류를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런 끔찍한 과거까지 본다면... 세상에 이용당하고 버려진다는 여성 서사 밖에 더 되냐고 ㅠㅠ 매우 걱정했는데 다행히 영화에 그런 장면은 없다. 대신 플로렌스 퓨가 당시 암살자로 키워진 여성들이 당한 자궁적출을 말로 빠르게 설명한다. 적절했다. 

 

영화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용 당하던 여성들이 움직이고 세계의 밸런스를 맞춘다. 모두를 각성하게 만드는 빨간 해독제를 보고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현실에 안주해 살아갈 수 있고,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볼 수 있다던 영화 <매트릭스>를.

 

영화가 가진 의미도 크지만, 여성 배우 캐스팅이 기가 막혔다. 특히 플로렌스 퓨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약간 덕심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조만간 필모깨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튼 이 영화는 마치 <로건>의 상조 서비스처럼 블랙 위도우에게 가족을 만들어줬다. 항상 다른 히어로의 조력자로만 나올 뿐 개인사는 전혀 드러나지 않아 그저 이야기에 이용당하는 희생양으로만 보이던 블랙 위도우는 이런 행복한 이야기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