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작년에 엄청 핫했던 걸 알고 있으나 SF라는 장르나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SF라는 거 외에 책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책을 펴고 나서야 이 책이 단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정도니. 책에는 총 7개의 단편이 실려있고 순서는 다음과 같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순서가 무척 잘 짜였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첫 번째 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편지글 형식으로 시작되는데 마치 작가가 나에게 아주 친근하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라 바로 집중할 수 있었고 그 이후 글의 전개 방식도 시점이 계속 바뀌는 것이 흥미로웠음. 

 

예상했던 SF 대서사시 같은 느낌은 아니다. 행성을 정복하기 위해 우주전쟁이 일어나거나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방위대가 나타나진 않는다. SF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 없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는군... 아무튼 영화 스타워즈나 스타트랙 같은 배경과 등장인물들, 사건. 아니면 영화 그래비티처럼 좀 더 있을 법한 우주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일 거라고 읽기 전에 제멋대로 생각했음.

 

내 예상은 빗나갔다. 단순 SF소설이라기엔 이 단편들엔 너무 많은 것이 담겨있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불행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싹둑 잘라버렸을 때 과연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 그럼에도 세대와 세대를 거쳐 점진하는 사람들.

 

관내분실 읽고 안 운 사람 있을까? 제일 좋아하는 단편 따로, 제일 인상 깊은 단편 따로 있는데 관내분실은 그냥 울 수밖에 없었음. 정말 신박하다고 느꼈던 에피는 공생 가설이었던 것 같다. 내 머릿속 외계 생명체는 언제나 우리가 만지거나 볼 수 있는... 실체가 있는 존재들이었는데 이런 상상도 가능하구나 깨달음을 얻었고 우울이 만져지는 감정의 물성도 정말 좋았음. 가장 좋았던 건 순례자들은~ 이다. 난 역시 좀 장소도 여러 군데 나오고 등장인물도 여러 명 나오는 게 좋아. 장편... 장편 써주세요 작가님...

 

가수 장기하는 이 소설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하던데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근데 내가 느끼기에 작가가 주는 희망은 인류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희망이라기보다 너무나 부서지기 쉬운 와인잔 같은 희망이다. 그것의 소중함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겨우 맥을 잇고 있는 그런 느낌의 희망.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이 읽혔으니 우리의 희망은 좀 더 길고 오래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다.

 

책에 줄을 몇 군데 그었는데 나중에 옮겨 적어야겠다.

릴리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치 않았던 존재로 태어난 릴리. 세계에서 배제된 릴리.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가능성을 입증한 릴리 다우드나. 그녀의 결정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릴리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오하지는 못했다. (중략)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를 나에게,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중략)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중략)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남자는 커다란 위성들 사이에서 초라한 안나의 셔틀이 파편들을 피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금세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은 작은 몸집이었다.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외에는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녀가 만성 전정기관 이상이라는 부적격한 건강 상태를 지녔으며, 근육도 뼈 밀도도 표준 신체에 미달하는 마르고 작은 체형인 데다, 이미 한 차례의 임신과 출산을 겪은 동양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하나둘 공개되자, 선발 과정에 대한 논란은 불길처럼 커졌다. 사람들은 어떻게 인류 대표가 최재경과 같은 부적절해보이는 인물로 선발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재경이 인류를 대표하기에 불충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재경이 인류의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하여 우주로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은 과소대표되면서 동시에 과대대표되었다.
대부분은 최재경이 막대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재경은 당시 유일한 여성, 동양인, 비혼모라는 눈에 띄는 특성들을 가지고 인류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야 했는데, 그녀에게 향하는 엄격한 검증의 신선들을 감당하기에는 재경의 그릇이 그만큼 크지 않았고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결국 자살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 주장들은 인류를 대표하는 자리에 안정적인 배경과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적절히 선발하여 배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말했고, 결국 '최쟁경 참사'가 인재를 적재적소에 제대로 발탁하지 못해서 일어난 인재라는 식의 결론으로 이어졌다.